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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바람이 전하는 말
  • 이두남
  • 승인 2020.10.1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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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남(칼럼니스트)

한로가 지나면서 햇살의 온도는 점점 세력이 약해지고 삶의 방향마저 모호해지는 요즘 세태에 마음은 더 움츠려 든다.

가을바람에 이끌려 수변공원으로 향했더니 홀로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 환하게 펼쳐진 호수의 수면은 보란 듯이 변해버린 계절을 어김없이 필사 하고 있다. 가을을 품은 호수의 얼굴은 온통 주름살이다.

산등성이를 쓸어 담고 하늘의 구름을 데려와 호수 위에 풀어 놓더니 오늘은 이들을 물 이랑에 넣어 조각조각 잘라 버린다. 순간 내 가슴도 여지없이 토막이 났다. 골짜기를 건너온 동해의 바람이 한 짓 같기도 하다.

호숫가를 거닐다 보면 허리 굽은 채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물푸레나무를 만난다. 직립보행이 어려워 손자의 유모차에 의지한 할머니들 생각이 난다. '그래 힘을 내야지' 하면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을을 힘껏 당기며 발에 감기는 해거름을 헤쳐 나가다 보면 어느덧 저물 녘 호수의 풍광이 동공을 끌어당긴다.

연이은 태풍에 잎을 떨쳐버린 나뭇가지에 몇 남지 않은 잎을 갈바람이 흔들어 대고 있다.

요즘처럼 오랜 기간 동안 비 대면의 매 마른 가슴을 가져 본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이 호수의 행간에 서면 나의 정서가 촉촉해진다.

세상의 거친 바람을 견디어 온 내 등뒤에서 옷자락을 잡아채 듯 어둑한 가을 저녁이 발 밑에 닿는다.풀벌레 소리를 담아내는 밤의 호수는 낮 동안 피로에 젖은 수면을 포근히 감싸주고는 은하계의 무늬로 바꾸어 놓는다.

호수를 거니는 동안 우울했던 마음에 평온이 찾아 들자 내 가슴만큼이나 팍팍했던 은하계에도 물길을 내어 주기 시작했다. 밤새 별들의 투정마저 받아내어 줄 것 같은 평온한 수면이다.

호수에 정박한 빛들은 각기 오랜 이야기를 지닌 것 같다. 빛의 특성은 드러내는 것이므로 아무리 약하고 작은 빛이라도 시야를 트이게 하고, 세상을 밝히려고 애를 쓴다.

우리가 절망하는 것은 빛이 약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아 있는 작은 불씨가 사라지기 전에 희망을 지키려는 강한 의지가 생을 지키는 파수병이 된다.

호수 건너편에서 몇 장의 가을을 저장한다. 밤의 호수는 많은 전설을 담고 있는 듯 그 깊이만큼 나 자신을 비틀며 사각의 틀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찰나의 피사체라지만 다채로운 감동으로 몰입했다. 거리 두기 일상을 탈피하는 비상구 이기도 하다. 어느덧 내 발걸음만큼이나 호흡이 가빠지고 어딘가 깊숙한 곳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가볍고 밝은 마음으로 하루를 여는 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가득 찬 기분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한 날 자유롭게 허락되는 것이 없는 요즘이지만 모든 부자유가 자유가 될 때 우리가 얼마나 잘 견디고 참아 왔는지 이야기 할 때가 있을 것이다. 

모든 먼지와 우리가 던지는 푸념을 흙탕물로 쓸어 담아 내지만 호수는 불평 불만을 말하지 않는다. 불만이나 갈등이 생기면 시선을 돌려 생각의 방향을 희망 쪽으로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가을에 핀 꽃은 봄 꽃보다 여리고 가냘프지만 향기는 강하다. 호수 주변에 피어난 코스모스, 들국화, 쑥부쟁이가 그러하다. 모진 태풍과 긴 장마에도 가을이 오기를 기다리며 결국 꽃을 피워 내고 말았다. 그들이 정작 이 가을의 주인공이고 아름다운 가을의 풍경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새로운 난관의 극복인 우리의 삶이 익을수록 고개 숙이는 가을 들판의 겸손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익숙한 것에서 멀어지고 평범했던 일상마저 낯설어 지는 현실을 호수에 그려보며 내 속에 촉촉히 차 오르는 희망을 한아름 건져 올려 본다.

이두남  who60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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